엄마이기 이전에 한 여성이 보였다
프로젝트

소식지 2023년 5월호(258호)

<정신건강연구소>

4월 7일 후기

엄마이기 이전에 한 여성이 보였다

김희정

 

내가 어머니 연구를 시작한 이유는 동생과 엄마 이야기를 하면서 나와는 다른 동생의 시선 때문이었다. 같은 엄마를 다르게 해석하는 이유가 내 성향 때문인지, 엄마가 다르게 양육했기 때문인지 궁금했다. 더불어 엄마를 향한 나의 마음도 알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엄마를 글로 써보고, 엄마에게 어머니 연구를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전화인터뷰를 시작했다. 첫 통화는 순조롭지 않았다. 내 질문이 추상적이라 엄마의 답도 애매했다. 질문을 바꿔 엄마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하나하나 들었다. 엄마는 바로 위 이모와 나이 차이가 11살이나 나는 이유부터 이모 등에 업혀 피난 가면서 본 풍경, 한강을 건너면서 부모와 헤어지면서 피난을 남쪽이 아닌 일산으로 가게 된 것과 오빠, 언니와 어떻게 그곳에서 살았는지, 부모와 재회하고 10살이 될 때까지 일산에서 살았던 것과 다시 서울로 돌아오게 된 이유, 그리고 서울 적응기 등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셨다. 

 

유년기와 다르게 서러웠던 청소년기의 엄마도 만났다. 엄마는 공부가 정말 재밌고 좋았단다. 하지만 목수였던 할아버지가 간헐적으로 돈을 벌어 생계를 이어갔기에 중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고도 돈이 없어 못 가 홀로 많이 울었다고 했다. 다행이 중등과정은 선교사들이 세운 공립학교에서 공부했는데 그 학교가 효창동에 있어 상도동에서부터 걸어 다녔고, 그때부터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했다고 했다. 

 

고등학교 대신 일을 시작한 엄마는 재봉기술을 빨리 익히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할 분량의 일까지 했고 빠르게 기술직이 되었다고 했다. 결혼하고도 한동안은 일을 다녔고 월급이 시계 수리직의 아빠보다 훨씬 많았기에 고모들까지 돌보며 살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린 아들이 엄마 찾으러 말없이 나가면서 직장을 그만뒀고, 부업도 내가 엄마 찾으러 말없이 나가 그만뒀다고 했다. 엄마는 돈을 벌지 못하니 최대한 돈을 안 쓰기 위해 우리들 겨울 코트까지도 다 만들어 입혔다. 

 

엄마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니 내 엄마이기 이전에 한 여성이 보였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는 것처럼 보였던 엄마가 라디오 상담방송만 듣고, 내게도 말을 안 하다가 “가슴에 시한폭탄 하나를 품고 있는 것 같다”라며 소리쳤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엄마의 말에서 어느 날부터 수 년 동안 입을 닫아버린 자식의 마음을 알고 싶었지만 섣부르게 말했다가 상처를 낼까 고민했던 엄마의 내적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니 연구를 하면서 나는 나의 엄마이기 이전에 나와는 같은 듯 다른 한 여성을 만났다. 그리고 그녀를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도 내가 원하는 표현을 다 해주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나에게 전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내가 싫어하는 엄마의 모습을 봐도 잔소리보다 내가 뭘 해주면 좋은지 물어보게 되었다. 엄마와의 통화가 즐겁고,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면 걱정보단 응원의 말이 나온다. 엄마를 안을 때면 “우리 엄마 제일 좋아!”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어머니 연구를 제안하신 문은희 선생님도, 매달 성실하게 참여하는 모람들도 참 귀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고, 이 모든 것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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