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평안
우리나라 여성의 삶 - 에릭슨발단단계를 따라
6강
프로젝트

우리 모람 가운데 한 사람에게 요즘 그가 감격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들으면서 나도 아주 감사했습니다. 모람과 그의 시어머니 사이에 오간 이야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많은 고부간 이야기는 긴장으로 정체되어, 아예 사이가 바뀌고 진전되기를 지레 포기하기 쉽습니다. 사람 사이의 푸근한 마음을 품어 나누는 관계로 발전하기 어려워합니다. 어떤 인간관계도 어느 시기에 변화를 멈추면 병이 납니다. 심리분석가가 등장한 이래로 어린 시절의 관계에서 파국을 경험한 이들이 이를 풀지 않으면 평생을 그 자리에 멈추어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부간의 앙심은 거기 멈추지 않고 남편과의 관계도 악화시키고 서로 “못 살겠다!”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미 늙은 시어머니에게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젊은 며느리는 사회참여 하면서 이런저런 관계의 지혜를 터득할 기회가 많습니다. 늙은 어머니는 그런 기회를 가질 기회가 없으니 지난 날에 더욱 집착합니다. 돌아가신 남편을 더 그리워합니다. 살아계실 때보다 더 아름답게 사랑을 그리는 낭만에 젖어 사십니다. 마음껏 사셨다고 생각하는 ‘내 집“을 그리며, 아들 며느리 보호 아래 다른 노인들과 지내시는 것이 불편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변화를 보이십니다. 늙은이라도 멈추지 않고 변화하는 것이 놀랍고 그래서 우리는 감격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주들과의 관계가 살아 뒷받침합니다.

 

늙은 몸으로의 자람이 이미 멈춘 것은 오래 전 이야깁니다. 그러기에 자람의 변화를 기대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몸은 퇴화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아집니다. 그러나 마음은 멈추지도 퇴화하지도 않습니다. 아, 물론 기억력이 줄어듭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늙은이도 지금 글을 쓰면서 적합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에둘러 다른 말로 얼버무리고 있습니다. 눈치채셨다구요?) 그러나 정서의 영역은 살아있습니다. 만족스러운 평안의 정서는 혼자 있어서는 자라기 어렵습니다. 혼자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격이 될 뿐입니다. 마음이 분주할 뿐입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제대로 부대끼며 사는 것이 우리 누구에게나 정서를 풍부하게 할 훈련장이자 공부 터입니다. 때로는 전쟁터라고 느껴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하면서도 실은 거기서 태어나고 자랄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이 관계의 갈등을 피해 숨으려 하면 자기 삶의 기회를 아예 놓치게 됩니다. 늙은이가 되었으니 이제는 험한 꼴 안 보고 삶의 터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겠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평생 살던 곳, 내 집에 가서 혼자 살 거야!” 합니다. 이제, 이 터에서 자기 성미에 맞지 않는 다른 할머니와 심하게 싸웁니다. “여기에서 살 수 없다”고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순간을 넘기면서, 가족밖에 몰랐던 분이 당신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십니다. 둘러보면서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구나!” 알아가십니다. 이제 와서 비로소 깨달아가십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사는 이곳이 진짜 삶을 살고 배울 수 있는 ‘배움터’라는 것을 며느리에게 고백하십니다. 어디 있던지 자기와 다른 사람들과 진짜 마음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신 겁니다. “저 할머니 이해할 수 없어” 하면서 외면하시는 일이 앞으로도 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 멈추지 않고 서로 이해하고 사과하면서 다시 시작하시는 걸 며느리는 셀 수 없이 볼 것입니다. 노인들이 모여 사는 곳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지나야 하는 가정, 학교, 놀이터 어디고 혼자만의 세계는 없습니다. 어떤 나이 때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람관계입니다. 공기와 물이 없이 우리 몸이 잠시도 견디지 못하듯이 우리 마음은 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해 서로 알아주며, 보살피며, 갈등하며, 갈등을 풀어가며 늙은이 되어서도 함께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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